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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상을 論하다/다른 이의 시선

나치도 ‘법치국가’였다

by 천광용 2009. 2. 5.
유대인의 기본권 박탈, 게르만인과의 결혼금지, 강제이주 및 집단 학살. 그리고 유전질환자에 대한 강제 불임시술. 나치가 저지른 패륜적 행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.

하지만 그거 아는가? 이 모든 행위에는 전부 법적 근거가 있었다는 거. 다들 나치가 극악했던 것만 기억할 뿐, 나치가 ‘법치국가’였다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. - 맨 처음엔 유대인의 기본권을 부인하는 법을 만들고, 그 다음엔 유대인을 강제 이주하는 법을 만들고, 그 다음엔 수용소에 가두는 법을 만들고 - 잔인하다 못해 애들 장난 같기만 한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법이란 형태로 만들어져 실제로 집행되었다.

법적 근거만 있다뿐인가? 이 법의 적용 역시 잘 훈련된 법관들로 구성된 법원에서 ‘법치국가’ 프로세스를 철저히 준수하며 이루어졌다. 게르만 인종의 혈통의 우수성을 보존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유전질환자에 대한 강제적 불임시술. 이를 결정하기 위해 유전병판정재판소라는 특별재판소까지 둘 정도였으니 그 얼마나 철저한가.

나치는 단순히 갈색제복 입고, 철십자 완장차고 몽둥이 들고 다니면서 독일을 통치한 애들이 아니었다. 엄연히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, 그 통치도 어디까지나 법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.

나치시대의 ‘법치주의’가 준 악몽. 그 악몽이 얼마나 컸던지, 현대 헌법학에서는 법치주의는 형식적 법치주의가 아니라 실질적 법치주의를 의미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.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에 대한 복종만을 강요하는 제도가 아니다. 더 나아가 복종을 강요하는 그 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법치주의라는 것 - 헌법을 막 배우는 법대 신입생도 아는 내용이다.

1년 사이. 법치주의란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이 잡혀들어갔다. 교통방해 명목으로 잡혀간 촛불시위대들. 언론은 정부를 비판하되 정부 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어려운 과제를 남긴 광우병 보도 관련 PD수첩 수사(가슴살 1파운드를 자르되 피는 나지 않게 자르란 얘기다). 글 두 편 잘못 써서 잡혀 들어간 미네르바.

그리고 엊그제. 법에 명시된 ‘정당한’ 보상을 거부하고 떼를 쓰던 용산의 ‘도시 테러리스트’가 법규정에 따라 진행된 경찰의 진압작전 도중 불에 타 숨졌다.

그렇다. 백보 양보해서 이 양반들의 행위 모두 실정법 위반이라 치자.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 실정법이 지킨 건 국민의 기본권인가? 아니면 법 자체의 권위인가?

나치가 준 진정한 교훈은 악(惡)의 은밀성이 아닐까 싶다. 악마가 ‘나 악마요’라 하고 이마에 써 붙이고 나타나준다면 뭐가 겁나겠는가? 하지만 악은 항상 악인지 선인지 판단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. 그렇다. 나치 시절 악은 ‘법치주의’란 가면을 쓰고 있었다.


<신민영 미용실|트위스트헤어 대표>
경향신문 '조영남을 넘어서' 칼럼
http://news.khan.co.kr/kh_news/khan_art_view.html?artid=200901221741005&code=990000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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